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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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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는 186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러시아의 작곡가, 지휘자, 음악원 원장이다. 9세에 피아노를, 11세에 작곡을 시작하여 밀리 발라키레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지도를 받았다. 부유한 후원자 미트로판 벨랴예프의 지원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하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 뛰어난 제자를 길러냈다. 8개의 교향곡, 발레 음악 《라이몬다》, 《사계》, 바이올린 협주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말년에는 소련을 떠나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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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리야 레핀의 글라주노프 초상화, 1887년
일리야 레핀의 글라주노프 초상화, 1887년
본명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글라주노프
출생1865년 8월 10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1936년 3월 21일
사망지프랑스 뇌이쉬르센
직업작곡가
지휘자
음악원 원장
활동 시기해당 정보 없음
장르클래식 음악
학력 및 경력
소속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사사해당 정보 없음
영향해당 정보 없음
작품
주요 작품작품 목록
참고 정보
관련 인물해당 정보 없음
웹사이트해당 정보 없음

2. 생애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글라주노프는 186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다. 러시아 5인조의 일원이었던 밀리 발라키레프에게 발탁되어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고, 그의 빠른 성장은 스승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16세에 작곡한 《교향곡 1번》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부유한 음악 애호가 미트로판 벨랴예프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벨랴예프의 지원은 글라주노프 개인뿐만 아니라 벨랴예프 원으로 알려진 젊은 러시아 작곡가 그룹 전체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글라주노프는 작곡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교향곡, 발레 음악,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동시에 지휘자로서도 활동했으나, 때로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1899년부터 교수로 재직하고 1905년부터 원장을 맡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의 활동이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의 혼란기에도 음악원의 자율성을 지키고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했으며, 특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점차 보수적인 성향과 변화하는 시대 사이의 갈등, 그리고 음악원 운영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1928년 소련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유럽미국 등지에서 활동하다 파리에 정착했으며, 1936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197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수도원 티흐빈 묘지로 이장되어 다른 러시아 거장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2. 1. 신동

글라주노프 가문의 문장


글라주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출판업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틴은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판본을 출판했으며,[40] 1882년에는 세습 귀족 지위를 얻었다. 글라주노프는 9세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1세(다른 기록에는 13세[40])에 작곡을 시작했다.

러시아 5인조의 전 지도자였던 밀리 발라키레프는 글라주노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작품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소개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당시 글라주노프를 14세 혹은 15세의 고등학생으로 기억하며, 그의 초기 관현악 작품에 대해 "어린애 같은 방식으로 쓰인 오케스트라 악보였"지만 "그 소년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했다"고 회상했다.[3][41] 발라키레프는 1879년 12월 직후 글라주노프를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데려갔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글라주노프를 개인적으로 가르쳤으며,[4][42] "그의 음악적 발전은 하루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간마다 진행되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그의 빠른 성장에 놀라워했다.[4][43]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변화하여, 1881년 봄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글라주노프를 단순한 학생이 아닌 젊은 동료로 여기게 되었다.[5][44] 이러한 변화는 같은 해 봄 사망한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의 빈자리를 채울 인물을 찾으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바람과 더불어, 글라주노프가 첫 교향곡 작업에서 보여준 발전을 지켜본 결과일 수 있다.[5][44]

1882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글라주노프가 16세 때 작곡한 《교향곡 1번 "슬라브풍"》을 초연했다. 이 작품과 젊은 작곡가는 알렉산드르 보로딘과 블라디미르 스타소프 등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글라주노프는 평생 8개의 교향곡을 완성했으며, 사망 당시 아홉 번째 교향곡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2. 2. 벨랴예프의 후원

일리야 레핀이 그린 미트로판 벨랴예프의 초상 (1886)


글라주노프의 작품에 대한 칭찬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그의 음악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 부유한 목재 상인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미트로판 벨랴예프가 있었다는 점이다. 벨랴예프는 작곡가 아나톨리 랴도프를 통해 글라주노프의 음악을 처음 접했고[6], 어린 글라주노프의 재능과 음악적 미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점차 민족주의 작곡가 그룹 전체로 확대되었다.[6]

1884년, 벨랴예프는 글라주노프와 함께 서유럽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 중 글라주노프는 바이마르에서 당대 거장인 리스트를 만났고, 그곳에서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제1번이 연주되는 기회를 가졌다.[13] 같은 해, 벨랴예프는 강당을 빌리고 오케스트라를 고용하여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제1번과 당시 막 완성된 관현악 모음곡을 연주하는 리허설을 열었다.[8] 이 리허설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벨랴예프는 다음 시즌에 글라주노프를 비롯한 다른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공개 콘서트를 열기로 결심했다.[9] 이 계획은 1886년부터 1887년 시즌에 시작된 러시아 교향곡 콘서트로 발전하게 된다.[10]

1885년 벨랴예프는 독일 라이프치히에 자신의 비용으로 악보 출판사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글라주노프, 랴도프,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의 작품을 출판했다. 점차 젊은 작곡가들이 벨랴예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고, 벨랴예프는 제출된 작품들을 심사하고 선정하기 위해 글라주노프에게 림스키코르사코프, 랴도프와 함께 자문 위원회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11] 이렇게 벨랴예프를 중심으로 모인 작곡가 그룹은 훗날 벨랴예프 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6]

2. 3. 국제적 명성

글라주노프는 곧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890년부터 1891년까지 창작상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1890년대 동안 그는 3개의 교향곡, 2개의 현악 사중주, 그리고 발레 음악 《라이몬다》와 《사계》를 완성했다.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글라주노프는 창작 능력의 정점에 있었으며, 이는 그의 국제적 명성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교향곡 8번》과 《바이올린 협주곡》이 꼽힌다. 그는 1907년 5월 17일 파리에서 열린 러시아 역사 콘서트의 마지막 날을 지휘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케임브리지 대학교로부터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작곡 활동 25주년을 기념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에서 그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축하 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2. 4. 지휘자 활동

글라주노프는 1888년 지휘자로 데뷔했으며,[13] 이듬해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자신의 《교향곡 2번》을 지휘했다.[13][53] 1896년에는 러시아 교향곡 콘서트의 지휘자로 임명되었고,[14] 같은 해 3월에는 차이콥스키의 제자 서곡인 《폭풍》의 유작 초연을 지휘했다.[14]

1897년에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 초연을 지휘했는데, 이는 재앙에 가까운 실패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라흐마니노프가 3년간 우울증을 겪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아내는 훗날 글라주노프가 당시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고 주장했다.[15][54] 쇼스타코비치는 글라주노프가 책상 뒤에 술병을 숨겨두고 수업 중에 몰래 마셨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러한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덧붙였다.[15][54]

실제로 술에 취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글라주노프는 이 교향곡을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고, 지휘 자체는 좋아했지만 지휘법에 완전히 숙달하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13][53] 그는 때때로 자신의 작품, 특히 발레 《라이몬다》를 직접 지휘하기도 했는데, 스스로 지휘에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다. 그는 가끔 농담 삼아 "내 작품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내가 훌륭한 지휘자이자 뛰어난 음악원 원장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6][55]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내전의 어려운 시기에도 글라주노프는 지휘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공장, 클럽, 붉은 군대(적군) 기지 등 다양한 장소에서 콘서트를 지휘했다. 1927년 러시아에서 열린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연설자이자 지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러시아를 떠난 후인 1928년에는 파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저녁 공연을 지휘했으며,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네덜란드,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지휘 활동을 이어갔다.[17][56]

2. 5.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1899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해고되었다가 재고용되는 사건을 겪은 뒤, 글라주노프는 음악원 원장으로 취임했다.[18]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이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지켰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음악원을 재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책임감 때문에 망명을 미루었을 가능성이 있다.[16][55]

원장 재임 기간 동안 글라주노프는 교육 과정을 개선하고 학생과 교직원의 수준을 높이는 데 힘썼으며, 음악원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오페라 스튜디오와 학생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설립이 있다.[13][53]

글라주노프는 학생들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다. 특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나 나탄 밀스타인과 같이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관심을 보였다.[13] 그는 매년 학기 말 수백 명의 학생들을 직접 시험하고 각 학생에 대한 평가와 추천서를 꼼꼼히 작성했으며,[13][53] 자신의 수입을 털어 곤궁한 학생들을 돕거나 정부에 학생들의 처우 개선을 호소하기도 했다.[57] 1922년 소련 정부가 글라주노프의 공로를 인정하여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제공하려 했을 때, 그는 자신보다 음악원에 땔감을 보내 학생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57]

특히 글라주노프는 당시 사회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유대인 음악가들이 페트로그라드에 거주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당국에 직접 허가를 요청했으며,[59] 음악원 내에서 유대인 학생 수를 따로 세지 않는다고 답할 정도로 차별 없는 태도를 보였다.[58] 야샤 하이페츠, 나탄 밀스타인, 미샤 엘먼 등이 그의 도움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59] 쇼스타코비치는 글라주노프가 유대인 음악가들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으며, 누구나 원하는 곳에서 살 권리가 있어야 예술이 발전한다고 믿었다고 전했다.

글라주노프의 높은 명성 덕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10월 혁명 이후 혼란기에도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 특별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교육부 장관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를 비롯한 볼셰비키 정권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글라주노프의 보수적인 성향은 음악원 내부에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일부 교수들은 더 진보적인 교육 방식을 요구했고 학생들은 더 많은 권리를 원했지만, 글라주노프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음악원 운영에 지친 그는 1928년 슈베르트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오스트리아 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부재 중에는 막시밀리안 슈테인베르크가 음악원을 운영했으며, 글라주노프는 1930년 공식적으로 원장직에서 사임했다.[12] 쇼스타코비치의 회고에 따르면, 말년의 글라주노프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수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전해진다.[60]

2. 6. 망명과 죽음

볼셰비키 체제, 특히 교육부 장관 루나차르스키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글라주노프의 보수적인 성향은 음악원 내부에서 비판에 직면했다. 교수진은 더 진보적인 학교 운영을 요구했고 학생들은 더 많은 권리를 원했지만, 글라주노프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음악원 운영에 지친 그는 1928년 에서 열린 슈베르트 서거 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소련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52] 그가 공식적으로 사임한 1930년까지는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크가 원장 대리를 맡았다.[52]

글라주노프는 유럽과 미국을 순회한 뒤 1929년 파리에 정착했다.[19] 그는 소련을 떠나 있는 이유를 망명이 아닌 "건강 악화" 때문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덕분에 다른 이유로 망명한 스트라빈스키라흐마니노프와 달리 소련 내에서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29년에는 파리 음악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자신의 발레 음악 《사계》 전곡을 최초로 전기 녹음 방식으로 남겼다. 같은 해, 64세의 나이로 10세 연하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가브릴로바(1875년–1968년)와 결혼했다.[61] 올가의 딸 엘레나 가브릴로바는 글라주노프의 양녀가 되어 엘레나 글라주노바로 불렸다.[62][63][64]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수도원 티흐빈 묘지에 있는 글라주노프의 묘


글라주노프는 1936년 3월 21일[65],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는데, 오랫동안 그가 과거의 음악가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이다.[65]

처음에는 뇌이쉬르센에 묻혔으나, 1972년 그의 유해는 당시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수도원의 티흐빈 묘지로 이장되었다. 이 묘지에는 러시아 5인조 작곡가들과 차이콥스키 등 러시아의 유명 음악가들이 함께 묻혀 있다.

3. 작품 세계

1913년 이전의 글라주노프


글라주노프의 작품 세계는 러시아 국민악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차이콥스키 풍의 낭만주의와 서유럽 음악의 기법을 융합한 것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5인조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으나(교향시 ''스텐카 라진'' 등), 점차 국제적인 양식을 추구하며 세련된 음악 어법을 구사했다. 이러한 변화는 3번 교향곡부터 시도되었고[23][83], 이후 작품들에서 러시아적 색채와 서구적 기법의 통합을 이루어냈다.[24][84][25][85]

후기에는 "러시아의 브람스"로 불릴 만큼 대위법적 구성, 치밀한 동기 작업, 변주 기법 등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의 활동 등으로 인해 후기에는 작곡 속도가 느려졌고, 결국 마지막 교향곡은 미완성으로 남았다.[26][86][27][87]

그는 발레 음악, 교향곡, 협주곡, 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남겼으나 오페라는 작곡하지 않았다. 대표작으로는 발레 음악 ''라이몬다''와 ''사계'', 후기 교향곡들, 《바이올린 협주곡》, 《색소폰 협주곡》 등이 꼽힌다. 또한 프레데리크 쇼팽의 곡을 편곡한 발레 ''레 실피드''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때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스트라빈스키 이전에 글라주노프에게 발레 ''불새''의 작곡을 의뢰하려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28][88] 글라주노프는 생전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말년에는 다소 보수적인 작곡가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작품들은 다시금 주목받으며 재평가되고 있다.

3. 1. 주요 작품 목록

글라주노프는 발레 음악, 교향곡, 협주곡, 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3개의 발레, 8개의 완성된 교향곡(9번은 미완성), 5개의 협주곡(피아노 협주곡 2개, 바이올린 협주곡 1개, 첼로 협주곡 1개, 색소폰 협주곡 1개), 7개의 현악 사중주, 2개의 피아노 소나타 등이 있다. 그는 오페라를 작곡하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 러시아 국민악파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었으나(교향시 ''스텐카 라진'', 초기 교향곡 등), 점차 차이콥스키처럼 서유럽의 음악 양식을 받아들여 국제적인 스타일로 발전했다. 후기에는 "러시아의 브람스"로 불릴 만큼 대위법과 치밀한 구성, 변주 기법 등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발레 음악 ''라이몬다''와 ''사계'', 후기 교향곡 중 4번, 5번, 6번, 두 개의 《연주회용 왈츠》, 그리고 야샤 하이페츠가 즐겨 연주했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색소폰 협주곡》(1934년)은 당시 서구 음악의 경향을 수용한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안무가 미하일 포킨과 협력하여 프레데리크 쇼팽의 피아노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발레 음악 ''레 실피드''를 만들기도 했다.

3. 1. 1. 발레 음악

글라주노프는 총 세 편의 발레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발레 음악은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며, 특히 ''라이몬다''와 ''사계''가 유명하다.

  • ''라이몬다'' 작품 57 (1897년): 총 3막으로 구성된 발레 음악이다. 이 작품에서 발췌하여 연주회용 모음곡이 편곡되기도 했다.
  • ''아가씨 하녀, 또는 여자의 시도(연애 대전)'' 작품 61 (1898년)
  • ''사계'' (Времена года|브레메나 고다rus) 작품 67 (1899년): 1막 4장으로 이루어진 소품 발레 음악이다. 겨울에서 시작해 가을로 끝나며, 특정 줄거리 없이 자연의 풍경을 묘사한다.


이 외에도 글라주노프는 안무가 미하일 포킨과 협력하여 프레데리크 쇼팽의 피아노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발레 음악 ''레 실피드''를 만들기도 했다.

3. 1. 2. 부수음악


  • 살로메 작품 90 (1908년)
  • 유대인의 왕 작품 95 (1913년)
  • 가면 무도회 작품 102 (1913년)

3. 1. 3. 교향곡

글라주노프는 총 8개의 교향곡을 완성했으며, 9번 교향곡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의 교향곡 작곡 양식은 초기 국민악파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적 색채에서 점차 차이콥스키와 같은 서유럽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을 받아 국제적인 스타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후기에는 "러시아의 브람스"로 불릴 만큼 대위법적 구성과 치밀한 동기 전개, 변주 기법 등이 두드러졌다.

초기 두 교향곡은 발라키레프보로딘과 같은 5인조 작곡가들의 민족주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글라주노프는 20대 초반에 이르러 민족주의와 아카데미즘의 이분법을 넘어섰고, 러시아 민족 음악에 뿌리를 두면서도 세련된 서구적 작곡 기법을 통합하고자 했다. 3번 교향곡은 이러한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차이콥스키에게 헌정되었다.[23][83]

4번 교향곡부터 글라주노프는 자신만의 성숙한 스타일을 확립했다. 안톤 루빈슈타인에게 헌정된 이 곡은 국제적인 양식을 지향하면서도 러시아적인 색채를 잃지 않았다.[24][84] 5번 교향곡 역시 민족주의 전통과 서구 기법의 성공적인 통합을 보여준다.[25][85]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원장직을 맡게 되면서 작곡 속도가 느려졌고,[26][86] 8번 교향곡 이후에는 과도한 음주가 창작 활동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결국 9번 교향곡은 1악장 스케치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었다.[27][87]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목록은 다음과 같다.

번호조성작품 번호작곡 연도별칭/특징/헌정
1번마장조Op. 51882년《슬라브》. 15세 작곡, 16세 초연. 스승 발라키레프 지휘 초연. 프란츠 리스트의 주목을 받음.
2번올림 바단조Op. 161886년프란츠 리스트 추모 작품.
3번라장조Op. 331890년차이콥스키에게 헌정.
4번내림 마장조Op. 481893년안톤 루빈슈타인에게 헌정. 러시아적 정서와 국제적 양식의 조화.
5번내림 나장조Op. 551895년"바그네리안"이라는 별칭이 있음. 웅장한 울림이 특징.
6번다단조Op. 581896년글라주노프의 대표적인 교향곡 중 하나. 2악장 변주곡, 3악장 간주곡 구성.
7번바장조Op. 771902년《전원》.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의식한 작품.
8번내림 마장조Op. 831906년글라주노프의 창작력 정점 시기의 작품 중 하나.
9번라단조-1910년미완성 (1악장 스케치만 존재). 가브릴 유딘(Гавриил Юдин)이 관현악 편곡.


3. 1. 4. 협주곡

글라주노프는 총 5개의 협주곡을 작곡했다.

  • 바이올린 협주곡 가단조 작품 82 (1904년): 비교적 짧은 곡으로,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가 즐겨 연주했으며 오늘날에도 종종 연주되고 녹음된다.
  • 피아노 협주곡 1번 바단조 작품 92 (1911년): 피아니스트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그가 피아노 파트를 개정했다.
  • 피아노 협주곡 2번 나장조 작품 100 (1917년): 단일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 발라타 다장조 작품 108 (1931년):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에게 헌정되었다.
  • 알토 색소폰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내림 마장조 (1934년): 글라주노프의 마지막 작품이다. 북유럽 출신의 색소폰 연주자 시구르트 라셔를 위해 작곡되었다. 작곡 당시에는 색소폰 협주곡이 드물었으나, 이 작품은 망명 중에 쓰였음에도 러시아적인 정취를 담고 있으며, 당시 서구 음악의 유행을 받아들이는 작곡가의 능력을 보여준다. 드물게는 비올라 협주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기도 한다.

3. 1. 5. 관현악곡

글라주노프의 작품은 대체로 러시아 국민악파를 계승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 차이콥스키의 흐름을 잇는 러시아 낭만주의와 융합시킨 작풍을 보인다. 초기에는 다채롭고 화려한 관현악법이나 풍부한 화성법을 사용했으며, 후기에는 서정적인 선율과 세련되고 우아한 표현을 도입했다. 나이가 들면서 "러시아의 브람스"라는 별명을 얻었듯이, 대위법적인 구성이나 치밀한 동기 작업에 의한 구축성, 변주 기법 활용 등의 특징이 강해졌다.

그의 관현악 작품 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두 개의 《연주회용 왈츠》이며, 이 외에도 다수의 관현악곡을 작곡했다.

주요 관현악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작품 번호 (Op.)작곡 연도비고
비가 『영웅의 추억에』81881년 - 1885년
성격적 모음곡91884년
서정적인 시121884년 - 1887년
교향시 『스텐카 라진』131885년리스트의 영향을 받아 작곡된 20세 약관의 작품. 명확하게 교향시라고 명명한 유일한 관현악곡이다.
환상곡 『숲』191881년 - 1887년
결혼 행진곡231889년
환상곡 『바다』281889년
교향적 회화 『크렘린』301891년
341891년
승리의 행진곡401893년콜럼버스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만국 박람회를 위해 작곡. 「리퍼블릭 찬가」를 소재로 사용했다.
서곡 『사육제』451892년
모음곡 『쇼피니아나』461893년쇼팽의 작품을 관현악 모음곡으로 편곡. 폴로네이즈, 녹턴, 마주르카, 타란텔라 4악장 구성.
연주회용 왈츠 1번 라장조471893년
축전 행진곡501894년
연주회용 왈츠 2번 바장조511894년
발레의 정경521894년8개의 무곡 등으로 구성된 연주회용 발레 모음곡.
환상곡 『암흑에서 광명으로』531894년
축전 서곡731900년
모음곡 『중세로부터』791902년
핀란드 환상곡881909년
축전 행진곡911910년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국의 국가에 의한 패러프레이즈96기미가요 주제 포함.
서사시1933년 - 1934년


3. 1. 6. 실내악곡

작품 번호조성작품명작곡 연도
작품 1라장조현악 사중주 1번1881년 - 1882년
작품 10바장조현악 사중주 2번1883년 - 1884년
작품 26사장조현악 사중주 3번 "슬라브"1886년 - 1888년
작품 64가단조현악 사중주 4번1894년
작품 70라단조현악 사중주 5번1898년
작품 106내림 나장조현악 사중주 6번1921년
작품 107다장조현악 사중주 7번1930년
작품 109색소폰 사중주곡1932년
작품 39가장조현악 오중주 1번


  • '''색소폰 사중주곡 작품 109''' (1932년): 색소폰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파리에서 작곡되었다. 색소폰을 위해 작곡된 가장 중요한 실내악곡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변주곡 형식으로 쓰인 제2악장이 단독으로 연주되는 경우도 많다.

3. 1. 7. 피아노곡

글라주노프는 교향곡, 발레곡 등 관현악 작품 외에도 여러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했다. 그의 주요 피아노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사샤의 이름에 의한 모음곡 작품 2
  • 3개의 연습곡 작품 31 (1889년 ~ 1891년)
  • 연주회용 대왈츠 내림 마장조 작품 41 (1893년)
  • 주제와 변주 작품 72 (1900년)
  • 피아노 소나타 1번 내림 나단조 작품 74 (1901년)
  • 피아노 소나타 2번 마장조 작품 75 (1901년)

4. 영향력



글라주노프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여 밀리 발라키레프와 당대 러시아 음악계의 거장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주목을 받았다.[3]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글라주노프를 개인적으로 지도하며 단순한 학생이 아닌 젊은 동료로 여겼고,[4][5] 그의 첫 교향곡은 불과 16세였던 1882년에 초연되어 알렉산드르 보로딘과 블라디미르 스타소프 등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3] 이러한 성공은 그를 젊은 나이에 러시아 음악계의 중요 인물로 부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오랜 기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원장으로 재직하며 러시아 음악 교육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볼셰비키 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교육부 장관 루나차르스키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음악원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52] 그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젊은 음악가들의 성장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 초연을 성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0] 그러나 그의 음악적, 교육적 관점에서의 보수적인 성향은 음악원 내에서 더 진보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교수진 및 학생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52]

1928년 에서 열린 슈베르트 서거 100주년 기념 행사를 계기로 국외로 나간 글라주노프는 다시는 소련으로 돌아오지 않았다.[52] 그는 망명이 아닌 건강상의 이유로 해외에 체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치적인 이유로 조국을 떠난 라흐마니노프스트라빈스키와는 달리 소련 내에서의 공식적인 명예를 잃지 않았다.[52] 파리에 정착한 후에도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연주 및 지휘 활동을 이어갔으며, 1929년에는 자신의 작품 《사계》 전곡을 직접 지휘하여 녹음으로 남기기도 했다.[61]

글라주노프가 1936년 70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동시대의 음악보다는 과거의 음악적 전통과 더 깊이 연관된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65] 그의 유해는 처음에 뇌이쉬르센에 매장되었으나, 197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당시 레닌그라드)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수도원 내 티흐빈 묘지로 이장되어 러시아 5인조의 다른 작곡가들과 차이콥스키 곁에 안치되었다.

4. 1. 스트라빈스키와의 관계

스트라빈스키는 《연대기》에서 젊은 시절 글라주노프의 완성된 음악 형식, 대위법의 순수함, 작법의 막힘없음과 확실성을 매우 존경했다고 밝혔다. 15세 때 스트라빈스키는 글라주노프의 현악 사중주곡을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하기도 했다.[69]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작품인 《교향곡 내림 마 장조》는 당시 유행하던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양식을 상당히 따랐으며,[70] 작품의 기본적인 수정을 할 때 같은 조의 글라주노프 《교향곡 8번》을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글라주노프에 대한 스트라빈스키의 존경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다. 스트라빈스키는 《회상록》에서 글라주노프를 가장 성격이 맞지 않는 인물 중 하나로 꼽으며, 《교향곡 내림 마 장조》의 비공개 초연 당시 글라주노프가 연주 후 "아주 좋네, 아주 좋네"라고 말하며 다가왔지만, 이후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는 "그런 곡으로는 관현악법이 너무 무겁네"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71][72]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음악이 나아가는 현대적인 방향을 글라주노프가 지지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글라주노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스승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 역시 음악원의 아카데믹한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만년에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하지만 글라주노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달리, 아카데미즘을 엄격히 따르는 것이 러시아 음악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았고, 새로운 발상이나 기법에 대해 스승처럼 마지못해 인정하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았다.[73]

글라주노프는 스트라빈스키를 직접 대할 때는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74]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스트라빈스키의 《불꽃》 연주를 듣고는 Kein Talent, nur Dissonanz|카인 탈렌트, 누어 디소난츠de("재능은 없고, 불협화음뿐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당시 청중 중에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있었고, 그는 이 곡의 표현력에서 발레 뤼스를 이끌 작곡가의 가능성을 발견했다.[75] 글라주노프는 결국 스트라빈스키를 관현악법의 대가로만 인정하는 데 그쳤다. 1912년 블라디미르 텔리아코프스키에게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에 대해 "저건 음악이 아니야. 하지만 관현악법이 훌륭하고 굉장하네"라고 말했다고 한다.[76]

4. 2. 쇼스타코비치와의 관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13세에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했다.[79] 당시 음악원장이었던 글라주노프는 젊은 쇼스타코비치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79]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작곡 스승 막시밀리안 슈타인베르크에게 쇼스타코비치의 학업 진척에 대해 주의 깊게 조언했으며, 쇼스타코비치가 박사 학위를 취득했을 때는 더 높은 학위를 목표로 하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79]

글라주노프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 초연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0] 이 곡은 1926년 3월 12일, 니콜라이 마르코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관현악단에 의해 연주되었는데, 이는 글라주노프 자신의 《교향곡 1번》이 같은 장소에서 초연된 지 44년 만의 일이었다.[80][81] 교향곡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무대에 등장한 젊은 쇼스타코비치가 어색하게 인사하는 모습은 글라주노프 자신의 청년 시절 성공을 연상시켰다.[80]

쇼스타코비치는 글라주노프에 대해, 때로는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음악원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평온, 창작력을 아낌없이 희생한 인물로 평가했다.[53] 글라주노프는 음악원 운영에 매우 헌신적이었고, 학생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따뜻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매년 수백 명의 학생들을 직접 시험하고 추천서를 작성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수입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53] 소련 정부가 그의 업적을 기려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제공하려 했을 때도, 글라주노프는 오히려 음악원에 땔감을 보내 학생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이타적인 면모를 보였다.[57]

또한 쇼스타코비치는 글라주노프가 유대인 음악가들을 차별 없이 대하고 그들이 페트로그라드에 머물며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점도 언급했다.[58] 글라주노프 덕분에 야샤 하이페츠, 나탄 밀스타인, 미샤 엘먼과 같은 재능 있는 유대인 학생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할 수 있었으며, 이는 예술에는 국경이나 차별이 없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다.[59]

한편,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에 따르면 글라주노프의 알코올 의존증은 상당히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쇼스타코비치는 글라주노프가 맨정신으로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워 보였고, 주로 실내악 수업만을 담당했다고 회상했다.[60] 글라주노프는 술 때문에 볼셰비키 정권으로부터 주류 판매점 출입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아버지를 통해 몰래 술을 구하려 했고, 쇼스타코비치는 아버지의 안전과 자신의 평판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 부탁을 전달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했다.[82] 쇼스타코비치는 글라주노프가 술김에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 공》 서곡을 사실 자신이 작곡했지만 보로딘의 이름으로 발표했다고 고백했다는 일화도 전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를 글라주노프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겸손한 인격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았다.[66]

쇼스타코비치는 글라주노프의 비범한 기억력에 대한 일화도 남겼다. 글라주노프는 단 한 번 문 너머로 들었던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교향곡 전체를 즉석에서 피아노로 연주했으며,[67] 몇 년 전 음악원 입학 시험에서 들었던 지원자의 소나타 일부를 정확히 기억해내 연주하기도 했다.[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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